글수 27
아침에 산에서 돌아와 신발을 벗던 중 신발끈이 닳아져 너덜거림을 알았다.
어째 발을 조여주지 못하고 헐렁하더니만
신발이 워낙 산을 뛰어 다니니 닳아지는 게 순식간이다.
전에 마라톤을 할때보다야 덜 마모되지만,
그래도 집에 휴식을 취하는 신발보다, 산천을 포효하면서 누비는 주인 잘못 만난 신발이 훨씬 많이 신체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의 현주소이다.
"어이! 신발이 벌써 다 되었네" 하고 아내에게 말하니, "아니 산 지 일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 그리되었소" 하면서 신발을 살피면서 "다시 사야 쓰겄네. 아니 밑창을 갈아쓰면 되겠네요" 하였다.
나는 아무래도 절약을 거론하면 항상 아내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간다. 여인네들은 큰 것은 대범하고 작은 것에는 일제 독립투사 열혈로 목숨을 건다. 물론 운동화가 신을만하면 수십만이니, 定額(정액)으로 살아가면서 삼겹 사겹 주름이 지는 주부--현재의 내 처지--에게는 결코 경시될 사안이 아니다.
그래 좋다 그럼 신발을 들고 거기 구입한 백화점으로 가자꾸나. 거기서 수리를 하자꾸나!
절약을 하면서 살아보자는 아내의 의도를 내 몰라라 할만큼 뜻도 고집도 거세지 못하고...
무엇보다 고쳐 쓸수있는 것은 고쳐 써보자, 자원 절약차원에서도 긍정적이지 않은가? 사실 말짱한 신발도 내팽겨치는 아파트 내 풍속이지만...
(사실 지푸라기 하나라도 들에서 거저 버리지 않았던 내 아버지 피를 나도 좀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고친다는 개념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버리고 그냥 사서 쓰자는 주의가 우세하다.
왜 그럴까?
첫째는 궁핍인지 궁색인지를, 고치는 과정에서, 절감하고, 중인환시리에 그런 상황을 타인들에게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ㅉ 팔리는 행위라서 그렇다.
모든 사람이 신발을 들고 고치면 그것은 흠이 아니고 면피가 덜 두꺼워도 된다. 그러나 거의 구십프로가 새 신발인데도 하수구 근방 쓰레기통에서 방치되는 현실에서 너덜거리는? 신발을 들고 수선공을 찾으면 신발 주인의 빈궁을 만천하에 선전하는 행위 다름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錢의 多寡(다과)만큼 인격을 규정하는 게있을까/?
나도 가르치는 者로, 금전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마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가르치지만...떨어진 신발을 들고 수선공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그림이 아니다.
역시 나는 凡人이니...
아이들에게 물자를 아껴써라 돈을 절약하라 풍요는 죄악이 될수있다.
교과서적인 말을 되네이지만 실제 상황이 내게 닥아오면 나는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 악어는 먹이를 잡아먹으면서 눈물을 흘린다하여 악어의 눈물(alligator's tear)僞善을 가르킨다.
그래도 이번에는 떳떳이 헤진 신발을 들고 수선공을 찾아볼 예정이다.
역시 언어와 행동은 首尾一貫(수미일관)으로 일치하여야 하니 그게 정답이다.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크면 어쩌지?
"비닐봉지에 넣게나 내가 들고 갈터이니"
그래서 말짱한 것도 버리고 새로 구입하는 일이 非一이고 非再이다. ( 다만 수선공의 영업 이익 공헌에 일익을 담당할 뿐이다. 그거라도 위안이 되면 값비싼 수선행위에 왈가왈부 하지 말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미시적으로는 가정경제면에서 절약을 실천하고 거시적 안목에서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구 살리기에 고귀한 동참을 한 것이다.
어째 발을 조여주지 못하고 헐렁하더니만
신발이 워낙 산을 뛰어 다니니 닳아지는 게 순식간이다.
전에 마라톤을 할때보다야 덜 마모되지만,
그래도 집에 휴식을 취하는 신발보다, 산천을 포효하면서 누비는 주인 잘못 만난 신발이 훨씬 많이 신체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의 현주소이다.
"어이! 신발이 벌써 다 되었네" 하고 아내에게 말하니, "아니 산 지 일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 그리되었소" 하면서 신발을 살피면서 "다시 사야 쓰겄네. 아니 밑창을 갈아쓰면 되겠네요" 하였다.
나는 아무래도 절약을 거론하면 항상 아내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간다. 여인네들은 큰 것은 대범하고 작은 것에는 일제 독립투사 열혈로 목숨을 건다. 물론 운동화가 신을만하면 수십만이니, 定額(정액)으로 살아가면서 삼겹 사겹 주름이 지는 주부--현재의 내 처지--에게는 결코 경시될 사안이 아니다.
그래 좋다 그럼 신발을 들고 거기 구입한 백화점으로 가자꾸나. 거기서 수리를 하자꾸나!
절약을 하면서 살아보자는 아내의 의도를 내 몰라라 할만큼 뜻도 고집도 거세지 못하고...
무엇보다 고쳐 쓸수있는 것은 고쳐 써보자, 자원 절약차원에서도 긍정적이지 않은가? 사실 말짱한 신발도 내팽겨치는 아파트 내 풍속이지만...
(사실 지푸라기 하나라도 들에서 거저 버리지 않았던 내 아버지 피를 나도 좀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고친다는 개념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버리고 그냥 사서 쓰자는 주의가 우세하다.
왜 그럴까?
첫째는 궁핍인지 궁색인지를, 고치는 과정에서, 절감하고, 중인환시리에 그런 상황을 타인들에게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ㅉ 팔리는 행위라서 그렇다.
모든 사람이 신발을 들고 고치면 그것은 흠이 아니고 면피가 덜 두꺼워도 된다. 그러나 거의 구십프로가 새 신발인데도 하수구 근방 쓰레기통에서 방치되는 현실에서 너덜거리는? 신발을 들고 수선공을 찾으면 신발 주인의 빈궁을 만천하에 선전하는 행위 다름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錢의 多寡(다과)만큼 인격을 규정하는 게있을까/?
나도 가르치는 者로, 금전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마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가르치지만...떨어진 신발을 들고 수선공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그림이 아니다.
역시 나는 凡人이니...
아이들에게 물자를 아껴써라 돈을 절약하라 풍요는 죄악이 될수있다.
교과서적인 말을 되네이지만 실제 상황이 내게 닥아오면 나는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 악어는 먹이를 잡아먹으면서 눈물을 흘린다하여 악어의 눈물(alligator's tear)僞善을 가르킨다.
그래도 이번에는 떳떳이 헤진 신발을 들고 수선공을 찾아볼 예정이다.
역시 언어와 행동은 首尾一貫(수미일관)으로 일치하여야 하니 그게 정답이다.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크면 어쩌지?
"비닐봉지에 넣게나 내가 들고 갈터이니"
그래서 말짱한 것도 버리고 새로 구입하는 일이 非一이고 非再이다. ( 다만 수선공의 영업 이익 공헌에 일익을 담당할 뿐이다. 그거라도 위안이 되면 값비싼 수선행위에 왈가왈부 하지 말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미시적으로는 가정경제면에서 절약을 실천하고 거시적 안목에서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구 살리기에 고귀한 동참을 한 것이다.


